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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시절-최측근-이후락에 대한 조카의 회고]

작성일 16-04-16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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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53 한준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74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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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조카는 왜 막걸리집에 김일성 사진 걸었나

15.12.15 16:01l최종 업데이트 15.12.15 17:59l
박정희 유신정권의 몸통 중 한 명인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을 10여 년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조카 이동휘를 만나 숨은 비화를 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 등 유신이 부활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은 시점에서 '지피지기'의 관점으로 비화를 연재한다. -기자말

10여년 만에 다시 만난 이후락 조카 이동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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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조카 이동휘씨 가게 '청사초롱'에 걸려 있는 사진.극비리에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이 1972년 5월 4일 김일성과 면담하면서 찍은 사진이다.
ⓒ 박석철

2015년 11월 마지막날, 울산광역시 중구 반구동. 지인이 알려준대로 반구시장 골목을 지나 50m 가량 걷자 '청사초롱'이라는 입간판이 보였다. 파전, 감자전 등을 파는 막걸리집이다. 미닫이 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서자 한 중년 남성이 막 손님에게 갖다줄 밑반찬을 담고 있었다. 그는 이동휘 였다(이하 존칭 생략).

이동휘는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하 존칭 생략)의 조카로, 30대 초반부터 10여년 간 지근거리에서 이후락을 보좌했다. 또한 1990년대 초 울산 최초 일간지 <경상일보>와 두 번째 창간한 <울산매일>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 때문에 한 때 지역에서는 기득권의 이름을 거론할 때 항상 앞자리에 그의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현재 그는 과거 명성과는 달리 영락없는 막걸리집 아저씨였다.

필자는 이날 아침 지인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동휘가 집사람과 둘이 어렵게 장사하는데 막걸리나 한 잔 팔아주자"고 했다. 필자의 고등학교 대 선배이기도 한 이동휘는 4년전부터 이곳에서 아내와 함께 장사를 하고 있다. 4년전 그에게서 "개업했으니 한 번 놀러오라"는 전화를 받았지만 여태 한 번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날 지인의 전화에 흔쾌히 "그러자"고 한 것은 그동안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있지만 그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이동휘와의 대면은 11년 만이었다. 지난 2004년 한 지역일간지에 근무하던 필자는 노조의 파업과 사주의 직장폐쇄 등으로 갈등을 겪을 당시 노조위원장이었다. 그때 이동휘는 사주와 노조의 중재역할을 하기 위해 선배로서 노조위원장인 필자를 찾아와 이런저런 제안을 했다. 하지만 당시 나는 그의 제안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단호히 거절했다.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그가 일간지 대표이사로 재직할 때 해당신문사 노조와 갈등을 빚었던 이력이 있었다는 점과, 당시 이동휘와 함께 근무했던 일부 기자들이 필자에게 그를 악평한 것이 그 배경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를 악평하던 일부 언론인들이 지금은 교과서 국정화 등 보수세력의 행보를 옹호하거나, 또는 노동자의 도시 울산에서 노조는 비하하고 대기업편을 드는 논조의 기사를 작성하는 모습을 보고 꼭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11년 전 그의 제안을 자세히 들어보기나 할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막걸리집에 걸린 김일성 사진 보고 화들짝 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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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조카이자 <경상일보> <울산매일> 대표이사를 지낸 이동휘씨가 자신이 운영하는 막걸리집에서 손님에게 갖다줄 밑반찬을 담고 있다
ⓒ 박석철

막걸리집에 들어선 필자는 깜짝 놀랐다. 방 한쪽에 김일성과 이후락이 악수하는 모습의 사진이 떡 하니 걸려있는 것이 아닌가. 극비리에 북한을 방문한 이후락이 1972년 5월 4일 김일성과 면담하면서 찍은 사진이었다. 여기다 더해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진이 담긴 북화 화폐 모음 수첩도 들어오는 손님들이 볼 수 있도록 걸어놓았다. 보수 성향이 강한 도시의 막걸리집인지라 다소 충격적이었다.

사진들을 보고 그에게 "손님들이 뭐라고 하지 않나"고 물었다. 그는 "통일을 하려면 대화가 중요하다. 손님이 무러오면 설명한다. 사진들은 대화의 필요성을 상기시키기 위해 걸어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휘는 지난 2009년 85세로 별세한 큰아버지 이후락을 여전히 마음속으로 보필한다고 했다. 특히 김일성과 이후락이 악수하는 사진을 수시로 보면서 통일을 생각한다고 했다. 그동안 이력으로 볼 때 '그가 극우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대화를 하다보니 이동휘의 통일에 대한 견해는 무척이나 진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필자는 물론 지역계에서 늘 궁금했던 것은 그의 정치이력이다. 신문사 대표이사를 그만 둔 그가 유일하게 정치에 몸을 담았던 1990년대 중후반 이후 5~6년을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새정치국민회의에서 활동했다는 점이다. 그는 새정치국민회의 울산지역당 부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런 점들이 막걸리 한 잔 하러 갔다가 그에게서 이후락과 관련한 비화를 듣는 인터뷰를 진행한 계기가 됐다. (앞으로 연재에서 공개)

이후락 조카 "이후락 생가 복원이 인생 마지막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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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28-3에 있는 이후락 생가. 조카 이동휘씨는 이곳에 거주한다. 그는 "이후락 생가를 복원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자 과제"라고 했다.
ⓒ 박석철

2015년 12월 14일 아침 일찍 이동휘에게 전화가 왔다. 이후락 생가에 같이 가보자는 것이다.

울주군 웅촌면 석천길 28-3에 있는 이후락 생가는 이후락이 울산농고를 졸업할까지 거주한 곳이다.

생가는 이동휘가 돈을 들여 수리를 했다지만 금방이라도 내려 앉을 것 같이 노후해 있었다. 하지만 이동휘는 이곳으로 거주지를 옮겨 생활하고 있다. 이동휘는 "이후락 생가를 복원하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원이자 과제"라고 했다.

몇 해 전 별세한 이동휘의 부친도 이곳으로 거쳐를 옮겨 마지막 생을 마쳤다. 이후락의 동생인부친 이거락씨는 지난 1970년 3월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를 가장한 살인사건의 희생자 정인숙 사건 때 마포경찰서장으로 재직했다. 그는 수사본부장으로 이 사건을 지휘하기도 했다. 형이 중앙정보부장이며 자신도 그 시절 요직의 경찰서장을 지냈지만, 막상 숨을 거둘 때는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못했다고 한다.

생가 인근에 있는 이후락의 별장은 이미 10여년 전 유족이 다른 사람에게 매각해 버렸다. 인근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에 있는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의 생가와 별장이 화려하게 복원돼 관광객이 찾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마치 권력의 무상함을 말해주는 듯 하다.

이후락 생가로 들어서는 길 한편에 이후락 문중 학성 이씨 묘가 있었다. 묘 바로 위에는 커다란 송전철탑이 놓여져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천 마리는 넘어 보이는 까마귀떼가 송전탑 주위에서 맴돌고 있었다. 이동휘와 필자는 한참동안이나 까마귀떼의 군무를 감상했다.

필자는 이후락 생가로 가는 도중 차안에서 "요즘 유신이 다시 부활한다는 우려 목소리가 있다"고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이후락이 청와대 비서실장이던 때 이곳 생가를 방문했다. 당시 문중 어른들이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조상 묘 위를 지나는 송전탑을 옮겨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후락은 '국가가 하는 사업을 국가의 녹을 먹는 사람이 관여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유신독재로 피해를 본 사람이 많고, 유신을 욕하는 것을 안다. 존중하고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도 "하지만 그 내면에 있는 것들도 봐달라"고 말했다.

이동휘 인터뷰 에피소드

여러차례 퇴근 후면 이동휘씨가 부인과 함께 생업을 이어가는 막걸리집 '청사초롱'으로 달려가 그와 이후락에 얽힌 이야기들을 인터뷰 했다. 이동휘는 필자가 막걸리값을 계산하면 꼭 선물을 하나씩 줬는데, 어느 날 김일성과 김정일 사진이 들어있는 북한화폐 모음 수첩을 선물했다.

이 수첩을 집에 가져가 가족들에게 보여주니 갓 군대에서 제대한 아들이 "아버지 같은 기자가 이런 수첩을 가지고 있으면 보안법에 걸릴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나는 "이동휘 선배님이 중국 여행 때 관광상품으로 사온 것으로, 이미 공론화 되고 상품화 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지만 아들의 우려는 계속됐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멘스?'. 하지만 아들의 말을 듣고 이 수첩을 진열해 놓으려던 처음 생각과 달리 보이지 않는 곳에 넣어 버렸다. "자기검열 하지 마라"고 비판하던 내가 어느새 자기검열을 하고 있었다. 문득 무서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이동휘씨를 만나 이 이야기를 하니 그는 "그런 옹졸한 생각으로는 통일이 되지 않는다"며 오히려 필자를 나무랐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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