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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기행-노벨상작가 프랑수아 모리악과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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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38 신경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 댓글 0건 조회 1,918회 작성일 2007-06-23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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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모리악과의 만남
 
보르도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프랑스문학 기행- 申吉雨>
 

동북아신문 기자 pys048@hanmail.net

 
[프랑스노벨상 수상작가 모리악과의 만남-모리악의 작가적인 삶은 어떠했을까?  프랑스 문학기행 특집 <프랑수아 모리악과의 만남>- <에세이문학> 2007년도 여름호(통권 98호, 2007. 6. 15.)에 실린 이 글에서 신길우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프랑수아 모리악, 경제적인 여유와 사랑을 받는 행복한 여건 속에서 살았고, 작가로서도 명예와 대접을 받았다. 그런 여건과 상황 속에서 모리악처럼 일탈(逸脫)하지 않고 삶에 충실한 작가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삶을 향유하기보다 성실하게 살면서 인간과 삶을 꿰뚫어 보고 탐구하고자 평생을 괴로워하며 창작활동을 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고전이 숨 쉬는 프랑스 문학기행기를 읽어보자. 

---편집자 주]

 

 

申吉雨 : 본명 신경철, 문학박사, 수필가, 연변대 초빙교수, 대학교수 정년퇴임, 현재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국제펜클럽 이사, 조운수필동인회 회장, 남한강문학회 회장, 한국수필문학진흥회․한국수필문학가협회 이사 등, 수필집에 <천국과 인간세계> <새와 인간> <언덕 위의 집> <아버지가 심은 나무> <모기 사냥> 등 10여권.

e-mail: skc66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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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길우 교수- 헬싱키에서
 1. 소설가 모리악에 대한 인상


  이번 프랑스 문학기행에는 보르도가 들어 있었다. 보르도는 문화적으로 3M이라 하여 《수상록》을 쓴 몽테뉴와 《법의 정신》의 저자 몽테스키외와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악을 배출한 곳이다. 그 중에 모리악은 20년 동안 자라며 산 보르도가 작품의 영감(靈感)의 원천이 되었다고 말한 곳이다.


  하지만 보르도는 초행이다. 모리악에 대해서도 별로 아는 것이 없었다. 그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이며, 인간 심리를 깊이 파헤친 작가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소설 《떼레즈 데께루》를 읽으면서 인식이 바뀌었다. 그가 1920년대에 이미 오늘날 전개되는 현대인의 심리를 심도 있게 파헤쳤고, 인간의 삶을 그 기본부터 다시 깊이 생각하게 문제를 던져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나 그와 유사한 모습이 실제로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리악은 그만큼 남다르게 인간의 실존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노력한 만큼의 가치가 있다”

  “죄인을 신자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자에게 이 세상에는 천국 이외의 것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소설의 과제이다.”


  이러한 모리악의 삶에 대한 해석과 주장은 어떻게 나왔을까? 그리고, ‘떼레즈’ 같은 인물을 어떻게 발견해냈을까? 이런 호기심과 궁금증이 이번 프랑스 문학기행에 참여하게 하였다.

  모리악은 근래에 우리에게 과거사 문제가 대두되면서 화제에 올랐었다. 모리악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저항운동에 참가했으면서도, 논설을 통해 나치 부역자들에게 국민 통합과 화해를 위해 “죽음의 쳇바퀴를 돌리는 대신 그리스도의 자비를 베풀자”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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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악
모리악은 1944년 9월부터 6개월간 계속된 알베르 까뮈와의 논쟁에서, 과거사 청산의 광기(狂氣)와 공포분위기 형성에 애국자와 반역자의 2분법이 사회를 분열시키고, 조사의 부실과 심판 절차의 문제점 등으로 억울한 희생자를 낳을 수도 있다며 나치 부역을 불가피한 부조리로 이해할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의 모든 과거의 불행은 반역을 처벌하지 못한 데서 온 것이다. 오늘 또 다시 처벌하지 않는다면, 주모자들을 처단하지 못한다면, 커다란 위험이 닥칠 것이다“ 이렇게 강력하게 처벌을 주장했던 까뮈가 결국에는 객관성과 공정성의 상실, 처단 위주의 청산에 의혹과 환멸을 느끼고 마침내 모리악이 옳았다고 선언하였다.


  훌륭한 정신은 반드시 훌륭한 문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삶을 성실하게 살며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이 없이는 나오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프랑수아 모리악은 작품과 함께 그의 삶도 유심히 살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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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악 생가
 
 

        2. 모리악의 생가, 기념관


  프랑스 보르도(Bordeaux)는 파리에서 서남방으로 400㎞쯤 떨어진, 대서양 연안의 항구도시이다. 파리 몽빠르나스 역에서 떼제베(TGV) 열차로 3시간이 걸린다.


  보르도는 피레네 산맥에서 시작된 가론(Garonne) 강과 도르도뉴(Dordogne) 강이 하나로 합쳐진 지롱드(Gironde) 강 줄기가 대서양으로 빠져나가는 그 하류에 자리하고 있다. 보르도는 물의 가장자리를 뜻하는 ‘보르 드 로(bord de l'eau)’란 말에서 유래됐는데, 주 이름 아키텐(Aquitaine)도 물을 가리키는 ‘아쿠아(aqua)’에서 왔다. 이처럼 강줄기와 바다를 끼고 있는 보르도 지방은 포도의 주산지일 뿐만 아니라, 보르도산 와인을 해외로 쉽게 수출할 수 있는 거점이 되었다.

 

 

 모리악은 21세에 파리로 공부하러 갈 때까지 이 보르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살았다. 그래서 강과 바다, 포도원과 항구와 전원 등 보르도의 모든 것이 그의 삶에 깊이 새겨져 작품마다 배어나오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성장기의 고향, 보르도와 랑드 지방이 항상 작품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했다.


  “만일 내가 밤에 잠들기 전에 항구에서 배의 기적소리를 듣는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만일 나의 긴 여름방학의 공원의 소나무들이, … 만일 모래가 내 벗은 발들을 뜨겁게 불태우지 않았더라면, 만일 오리나무들 사이에서 이 갈증의 고장의 얼음같이 차가운 시냇물들이 영원히 나를 매혹시키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 이야기를 다른 어조로, 다른 목소리로 이야기했었으리라.” <프랑수아 모리악의 얼굴들, 1985>


  모리악의 생가 및 기념관은 보르도 동남쪽 말라가(Malagar) 지역에 있다. 보르도 시에서 50㎞쯤 떨어진 곳인데, 들녘의 시골 풍경이 널린 곳이다. 모리악은 18살 때부터 이곳에서 살았다. 그가 살았던 집은 여러 군데에 더 있는데, 해마다 4월말부터 5월까지 살던 집들을 중심으로 <모리악 투어>가 열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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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색에 잠긴 모리악
생가 앞 작은 정원으로 들어서자 왼쪽에 노목 한 그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노목은 밑둥치가 세 아름은 되었고, 쭉쭉 벋은 여러 가지들이 우산살처럼 뻗어 늘어져 있었다. 생가는 그 뒤로 길게 좌우로 서 있었는데, 조부가 지은 것이라고 한다.


  건물의 뒷면은 창을 제외한 거의 모든 벽면에 담쟁이가 처마 밑까지 벋어 있었는데, 건물의 오른쪽 측면도 위쪽만 제외하고 온통 담쟁이로 덮여 있었다. 2층의 지붕들은 경사가 완만한데 붉은 기와로 덮여 있었다.


  관리인의 설명을 들으며 현관에 들어서자, 사용하던 의자와 책상, 거울과 화장대 등이 놓여 있고, 벽면에는 모리악의 조부모와 부모와 형제자매들의 초상과 사진,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왼쪽 방에는 창 옆 벽에 천정까지 닿은 두 개의 책장과 함께 책상과 벽난로도 보였는데, 벽에는 가족사진과 아내와 자녀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가구들은 고가구상에서 구입하여 사용하던 것들이라 한다.


  거실의 출입문은 양쪽으로 둘이었는데, 주출입문으로 밖을 바라보니 강과 계곡이 눈 아래로 들어왔다. 반대쪽 문으로는 포도밭과 구릉들이 내다보였다. 양쪽 풍경이 고향을 보는 듯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

 

 

  모리악 기념관은 본채 옆에 직각으로 길게 지어져 있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기다란 방 하나로 꾸며져 있었다. 한 쪽에 자료들이 전시되었고, 사면의 벽에는 많은 그림과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모리악이 어릴 적부터 별세할 때까지의 사진들이 연대별로 게시되어 있었다.

  나는 모리악이 노벨상을 수상하는 사진보다 그 뒤의 노년에 사색하고, 신문이나 책을 읽고, 손주를 안거나 놀아주는 모습들에서 훨씬 더 친근감과 작가다운 느낌을 받았다. 인생이란 마지막의 모습이 가장 그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쪽에 서 있는 모리악의 추상적인 동흉상(銅胸像)을 보고 그 옆에 서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관리사무실은 출구 앞 별채 1층에 따로 있었다. 팸플릿과 몇 가지 책자들이 대부분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다. 영어로 된 모리악의 연보 중심의 것을 하나 골랐다.

  집 뒤편 길로 나와서 바라보니, 생가 건물은 담쟁이 잎들이 처마 밑까지 파랗게 덮어 더욱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주변은 포도밭이었는데, 키가 1미터도 안 되는 작은 와인용 포도나무 등걸들이 질서정연하게 정렬해 서 있었다. 이 작은 나무에서 그 유명한 와인이 솟아난다니…. 능력은 꼭 몸집의 크기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차에 올랐다.


        3. 모리악의 생애와 문학


  프랑수아 모리악(Francois Mauriac)은 1885년 10월 11일 프랑스의 서남부 아키텐(Aquitaine) 주의 해안도시 보르도에서 아버지 장 뽈 모리악과 어머니 끌레르 모리악의 5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모리악의 친가는 부유층으로 무신론자에 공화주의자였다. 그의 증조는 넓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자크는 재산을 더 늘려 저택을 세우고 넓은 소나무 숲과 포도밭을 가진 부농으로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는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책을 좋아하며 시를 즐겨 낭송하고 때로는 쓰기도 하는 문학적 소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어머니 쪽도 부유한 집안으로 보르도 중심가에서 상업에 종사하였는데, 신앙심이 깊은 엄격한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어머니는 강한 정신과 깊은 신앙심으로 아비 없는 자식들이 버릇없이 굴지 못하도록 엄하게 양육하였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구노와 슈만의 노래를 즐겨 불러주기도 했다. 아버지의 얼굴도 제대로 모르는 막내란 데서 모리악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깊었고, 모리악도 어머니를 존경하여 어머니에게 속한 물건까지도 신성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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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친- 끌레르 모리악
어머니는 검소와 절약의 생활로 재산을 늘렸고, 자선사업도 하며 환자와 어려운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신앙인으로 살면서, 영혼의 순수성과 육체에 대한 혐오감을 강조하였다. 어머니의 이러한 삶과 태도는 자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모리악의 작품들에 영혼과 육체, 하느님의 은총과 자연의 갈등이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진 것도 그 영향이다.


  모리악은 12세에 중학교에 가서는 수학과 과학을 싫어했으나, 라틴어와 역사를 잘하고, 작문과 음악에서 여러 번 상을 받았다.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으면서 불어를 열심히 하여 매년 일등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일기와 시를 썼는데, 첫 작품 <합장>이 그때 쓴 시이다.


  모리악은 많은 책을 읽었다. 파스칼의 《팡세》는 항상 머리맡에 두고 애독하였다. 그가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뜨게 되자 부유층의 가치들에 의문을 갖기 시작하였다. 첫 소설 <가 버려라>가 이때 13살에 쓴 것이다. 아버지의 부재(不在)를 아쉬워하였지만 그는 아버지의 독서열과 문학 사랑의 정열과 재능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의 작품은 거의 그가 자란 기옌느(보르도와 랑드 지방) 지방과 연결된다. 성장할 때까지의 고향의 모습은 그의 작품에 크게 영향을 주고 무대가 되었다.


  “내가 우리의 기옌느에 빚지고 있는 것, 그것은 내가 어린 시절부터 그것으로 침투되었던 그것의 분위기이며, 나의 책들 속에서 떠돌고 있는 이 영원한 폭풍우이며, 그것들의 지평선에 화재의 이 빛이다. 바로 이것이 나의 땅이 나에게 준 것이다.”<프랑수아 모리악의 얼굴들, 보르도, 1985>


  그러나 모리악은 점차 보르도가 지적(知的)인 사막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1906년에 보르도 대학을 졸업하자 공부를 핑계로 1907년에 파리로 갔다. 그는 집안이 넉넉함을 알고 자퇴하고는 문학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1909년 10월에 첫 시집 《합장》을 출판하였다.

  1912년 여름방학에 모리악은 보르도 회계국장이며 프랑스 은행 운영위원의 딸인 18살 잔느 라퐁을 만났다. 1913년 5월에 첫 소설 《쇠사슬에 묶인 아이》를 출판하고, 6월 3일 보르도 교외 딸랑스의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에 모리악은 너무 허약해서 참전하지 못하자 쓸모없는 존재라며 괴로워하였다. 1915년 6월에 모리악은 의무부대에 입대되어 군인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하고, 전쟁의 무모함과 살육에 분노하며 평화를 갈망하였다. 1916년 12월 1일에 터키의 적십자병원에 배속되었다가, 늑막염 재발로 4월 6일 귀국하였다.


  1917년에 스승이며 형과 같던 매형인 조르주 휘우가 죽었다. 쇠약함과 무능감, 불만족한 마음 등으로 모리악은 괴로워하였다. 신의 역할에 회의하고 살아남은 죄의식 등으로 편하지 못했다. 이러한 때 1918년 2월 3일 모리악은 존경하는 마르셀 프루스트를 만났다.


  1920년에 그는 시의 한계를 느끼고 소설 <살과 피>를 발표하였다. 보르도의 포도주 생산 상사들에 대한 풍자소설 <특권층 사람들>은 1921년에 출간되었다. 1922년에 모리악은 천재성이 평가되는 <문등병자에의 입맞춤>이 발표되었다. 이 책은 출간 4개월에 1만 8,000부가 팔렸다.

  1922년 11월에 모리악의 스승이라 할 만했던 프루스트가 사망하자, 사람들은 “마르셀 프루스트의 죽음과 프랑수아 모리악의 탄생”이라 하였다. <문등병자에의 입맞춤>으로 모리악이 크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명사들의 초대와 축하를 받으며 유명한 식당과 뮤직홀 등에 자주 드나들며 몇 년을 보낸다. 그러나 그런 곳의 분위기에 충격을 받고, 그런 생활에서 탈출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모리악은 칩거하면서 <불의 강>을 썼는데, 1923년에 출간되자 많은 부수가 팔려 명성이 높아졌다.


  1925년 40살이 되자 그는 노년기가 시작됨을 느끼고, 모든 것이 곧 끝날 것이라며 생각하며 소설 비평 논문 편지 등을 마구 써댔다. 그의 부인 잔느는 헌신적으로 그의 모든 일에 앞장서서 참여하고, 의견 교환과 원고 타자를 해주었다. 모리악은 1925년에 낸 <사랑의 사막>으로 11월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소설 대상을 받고, 그 세대 5대 소설가 혹은 6대 소설가 중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떼레즈 데께루》는 1926년 11월부터 ‘르뷰 드 빠리’에 게재되기 시작했고, 1927년 2월에 단행본으로 출판되었다. 모리악은 이 작품으로 진정한 소설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의사의 집에서의 떼레즈>, <호텔에서의 떼레즈>를 쓰며, 떼레즈의 개심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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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악거실
  《떼레즈 데께루》는 인간이 이유도 없이 자신도 모를 광기(狂氣)에 휩싸일 수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혼자만 떨어져 지내는 고립과 감금 생활의 외로운 모습과 방치된 혼자뿐인 그녀의 모습에서, 우리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이 소설은 단지 여권(女權)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문제를 탐구하고 제기하고 있다. 아무도 모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정신세계를 느끼며, 오늘날의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생각하게 한다.


  1937년에 스페인에서 프랑코의 쿠데타가 일자 반대운동에 협조하고 공화주의자들을 지지했다. 나치독일의 치하에서는 저항의 책도 내고, 레지스탕스의 전단을 지닌 채 체포되기도 했다. 1943년 10월 10일부터 나치를 피해 다니다가, 해방된 뒤 1945년 8월 31일 파리로 돌아왔다.

  1952년 11월 6일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는데 “영혼을 파고드는 분석과 예술적 강렬함으로, 소설이란 형태로서 인간의 삶을 해석했기 때문엽라 하였다. 12월 10일 스톡홀름 시상식에서 그는 “삶이 한 방향을 갖고 있고, 삶이 한 목표를 갖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 인류는 절망한 인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1960년 3월 19일 모리악은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훈장을 받았다.


  1969년 말부터 건강이 악화되고, 1970년 8월 23일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는 9월 1일 새벽 1시 40분에 숨을 거두고, 9월 5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장례를 마친 뒤 베마르의 무덤에 묻혔다.


        4. 마무리


  이번 프랑스 문학기행에서는 여러 명의 유명한 작가의 기념관과 생가와 묘지, 동상 등을 찾아가 보았다. 공원마다 세워진 많은 동상과 석상과 기념비들, 살던 아파트 입구에 붙여놓은 기념판과 살던 곳 길가마다 세워놓은 기념표지판들, 그 많은 것들 대부분인 시인이요, 소설가, 극자가요, 아니면 음악인, 화가, 조각가의 것들이었다. 파리 팡테옹 지하묘지에는 문인과 예술인들의 묘와 조각상들이 많았다. 뤽상부르 공원의 문인상 앞에는 꽂이 놓이고, 공원의 벤치와 의자에는 앉아서 혹은 누어서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사실에서, 프랑스가 어째서 훌륭한 문인 예술가들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왜 문화의 중심 국가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문화의 기본인 문학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문화가 꽃필 수 없으며, 문인들을 기리지 않고서는 문학도 문화도 발흥할 수 없는 것이다.


  모리악은 노벨문학상 수상 소설가로 알려져 있지만, 시집 4권과 희곡 4편에, 영화 시나리오도 썼다. 에세이와 비평, 회고록도 다수 발표했고, 까뮈와 논쟁을 하며 많은 신문기사와 논설도 썼다.


  그는 살아온 고향에서 창작의 영감을 받았다. 소설들은 고향과 자신의 삶과 깊게 관련된다. 경제적으로 여유롭게 살고도 부유층의 문제를 제기하고 풍자했으며, 모계의 독실한 가톨릭 가정에서 자랐으면서도 맹신하지 않고 갈등하였다. 그는 인간의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여 삶의 문제를 예리하게 파헤쳐 우리 앞에 제시하였다. 몇몇 작품에서는 오늘날에야 나타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어 그 예지적 인간 탐구가 놀랍기도 하다.


  프랑수아 모리악, 경제적인 여유와 사랑을 받는 행복한 여건 속에서 살았고, 작가로서도 명예와 대접을 받았다. 그런 여건과 상황 속에서 모리악처럼 일탈(逸脫)하지 않고 삶에 충실한 작가도 흔치 않을 것이다. 그는 삶을 향유하기보다 성실하게 살면서 인간과 삶을 꿰뚫어 보고 탐구하고자 평생을 괴로워하며 창작활동을 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 <2007. 6. 15. 계간 『에세이문학』 여름호, 통권 제 98호 게재>



 
2007년 0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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